생일 - 6월 8일 (세계 해양의 날)
종종 정신을 잃었다. 눈을 감았다 뜨고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가 정신을 차렸구나. 라고 자각하는 것 하나 뿐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 틈새 사이의 시간으로 다시 잠들어 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채로, 계속해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작은 소음을 듣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눈을 떴을 때는 내가 스스로 기억하는 감각과 다른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은 어디지. 눈을 뜨니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상한 약품 냄새, 덜그럭거리는 유리병 소리. 그리고 내 몸에 연결된….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일어났니?”
어른. 어른이라는 느낌의 깊은 울림이었다. 이런 낮은 목소리는 잘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대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보자, 정말 뻔하디 뻔하게 미디어 매체에 나올 것 같이 고글을 쓰고 흰 가운을 입은…. 웬 연구원처럼 생긴 사람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라고 질문을 하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에른스트 쉴러. 이 연구소의 소장이야.’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나는 그래서 뭐, 그게 왜요? 더 할 말 있어요? 라고 말하듯 계속해서 빤히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에른스트는 한 번 작게 웃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게는 이제부터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네가 도와주지 않겠니? 영문도 모른 채 이 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런 아이에게 도와달라는 어른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라고 생각하던 순간, 무엇인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기가 서려왔다. 나는 얼떨결에 그 한기를 느끼며 일단 에른스트의 손을 잡았다. 왠지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에른스트는 내가 자신의 손을 마주 잡아주자 그걸 보고는 생긋 웃어주었다. 그러고는 운을 떼었다. ‘고맙구나.’ 그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언제부터 정신을 잃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잠시 생각을 하려고 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 있은 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사람을 무기로 만드는 실험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실험체가 될 거라고 했고. 하, 웃기지 않나. 도움이 필요하다고 지껄여 놓고는 그 도움이라는 게 결국 나를 실험체로 쓰려는 거라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 거의 즉각적으로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무엇인가가 있지는 않을 거라고, 결국 내가 생각하는 범주 안의 뻔한 장소일 거라고. 처음 이곳에 올 때부터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뭔가 왠지 모르게 진이 빠지고 힘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에른스트는 종종 내게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주었다. 나는 내 취향을 이야기하거나 바깥세상의 기호식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그가 어떻게 내 취향을 알아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알 수 있으니까 알고 있지.’ 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그는 항상 매우 바빠 보였다. 무엇인가 서류 뭉치를 여러 개 나를 때도 있었고, 다른 방에 있는 누군가를 관찰하러 간다고 할 때 또한 있었다. 내가 투명한 통 속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모습 뿐이었다. 이 곳에 있다고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내가 해야 하는 일도 크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저 몸에 연결되어 있는 이 선을 뽑지만 않은 채로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뭔가 상당히 시시하게 느껴졌다. 지루해.
에른스트를 관찰하는 일은 매우 지루한 것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행동 반경이나 패턴이 똑같을 수가 있담. 이제는 관찰하는 것 따위 의미없다고 느꼈다. 아침 9시, 일어나서 커피를 타 한 잔 마신다. 아침 10시. 나를 포함한 모든 실험체들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선의 상태를 확인한다. 오전 11시. 서류 작업을 엄청나게 많은 양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점심 12시. 이른 점심을 한 끼 간단하게 먹는다. 오후 1시. 밖에 나가서 잠시 산책을 하고 온다. 오후 2시. 이 때 쯤에 간혹 실험체가 하나쯤 더 들어오는 때가 있다. 오후 3시. 실험체 하나하나의 상태를 살핀다. 오후 5시. 매일매일 색이 다른 약물을 주사한다. 오후 6시. 낮잠을 한 번 잔다. 오후 8시. 또 서류를 많이 처리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오후 9시. 늦은 저녁을 부랴부랴 챙겨 먹는다. 오후 10시. 나와 다른 친구들을 모두 재운다. 나는 또 그 다음 아침 9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 사이에 그가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에른스트는 뭔가 이상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마치 처음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인사를 건넨다. 안녕, 이 곳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지금 상태는 어떠니. 안녕, 일어났어? 잘 자더구나. 이곳은 연구소야. 내 이름은 에른스트 쉴러고.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는 것을 꼬박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른다. 거의 백 번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하루가 끝나갈 때, 그는 매번 나에게 이상한 사과를 한 번 한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렇게 영문을 모른 채로 잠이 들면 또 다시 다음날 아침이 되고, 에른스트는 또다시 내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내가 반응하게 되는 말 또한 점점 기술이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왜 다시 인사하는 거예요? 혹은 어제 했던 말을 또 하는 데에 의미가 있나요? 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매번 하던 똑같은 말이 아니라 그렇게 다른 말을 할 때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종이에 무엇인가를 메모했다. 내가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를 대략적으로 기록하는 것 같은데…. 그게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항상, 내게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고. 왜 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깨어날 때마다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을 기억했다.
이 과정이 몇백 번 반복될 때까지는 이게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오백 번쯤 반복되었을 무렵부터는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똑같은 하루가 천 번쯤 반복되었을 때에는 무기력하게 축 처져서 그가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천 이백 번쯤 되었을 때에는 내가 들어가 있던 유리 관을 부수려고 시도했다. 이상하게도 하루가 지날 때마다 내가 부수고 손상시킨 모든 것은 원래 상태로 복구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것이 에른스트 쉴러 그 자체일지라도. 살아있는 인간에게 상처를 입혀도 다음 날이 되면 그 사람 또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 때부터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천 오백 번쯤 되었을 때에는 그가 내가 어떤 말을 할 때마다 기록하는 것인지 실험했다. 이런 저런 말을 다 늘어놓아 보기도 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전부 무시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에른스트는 그렇게 조금 특이한, 정형화되지 않은 반응이 나올 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종이에 무엇인가를 기록했다. 내 반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관찰하는 건가? 그런데 어떻게? 그는 변하지도 않고 딱히 내가 어제 했던 말이나 행동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런 존재가 어떻게 내 말을 기록하고 알아차리는 걸까.
시간이 지날 수록 아침에 잠시 서류를 처리하는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고 길어진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한 시간, 두 시간이 걸리다가 2천 일쯤 되었을 때에는 하루에 네다섯 시간 정도를 서류 처리에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점점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뭘 하는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저 점점 지쳐갈 뿐이었다.
그리고 하루는.
2341일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니, 날짜를 셀 때 중간에 몇 번을 빠트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확히 며칠째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그 언저리이겠지. 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날은 내가 새로이 가지게 된 신체를 통해 내가 들어가 있는 공간의 유리를 모두 부숴 버렸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머리에는 뿔같이 생긴 것이 자라나고, 허리쯤에는 무엇인가 이상한 신체기관이 하나 더 생겨 그곳에서 문어다리같은 것을 빼내 늘렸다 줄였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걸 사용하니 유리는 아주 쉽게 부서졌다. 마치 지금까지 왜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듯이. 너무나도 쉽게 부서졌다. 그리고 그 뒤에는 조용히 웃음을 짓는 에른스트 쉴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었다.
“B-334. 2346일만에 성공.”
그렇게 말한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이미 그를 죽여버리고 난 뒤였다. 너무 싫어서 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그저, 내 몸에 달린 새로운 무엇인가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사람의 몸은 너무나 약해서 너무도 쉽게 부서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시 내일이 되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가 죽은 이상 더 이상 어제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세계관, 설정 정리]
실험은 같은 날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처음 아이를 데려온 날을요. 계속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서 결국 이 곳을 부수고 생명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병기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에른스트 쉴러는 연구원이자 희생양입니다. 아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다. 라는 것을 그를 죽이는 것으로 확인해야 하거든요. 애초에 그런 목표로 배치되어 있는 연구원입니다. 아이는 조금 특별한 병기로 키워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뿔과 허리춤에 자라난 새로운 신체기관 이외에도 ‘반복되는 하루의 루프 속에서도 다른 존재와는 다르게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는 존재’로 키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하루를 기억할 수 있었고, 약 2346일이라는 날짜동안 자신 주변의 환경이 몇 번 초기화 되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 사실을 비로소 에른스트 쉴러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난 후, 루프가 끝난 후에야 알게 됩니다. 스스로가 갇혀 있던 곳이 루프 속이라고. 이제 아이는 전장으로 보내질 것입니다. 완전한 병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싸워야 하니까요. 그리고 아마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스스로가 영영 죽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겁니다. 자신이 죽을 때마다 꼬박 하루 전으로 돌아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요. 아이의 몸에 연결되어 있던 것은 아이를 서서히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새에 죽이는 약물을 주입하는 관이었고, 아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하루 전으로 돌아오며 그 과정에서 중간에 주사기를 통해 신체에 변형을 주었던 것의 영향으로 새로운 신체기관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에른스트 쉴러가 매일 처리했던 서류 작업은 ‘지금까지 아이가 보인 반응을 기록한 문서’의 확인 작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짜가 많이 지날 수록 서류의 양이 더욱 많아졌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루프 속의 또 다른 자신이 적어왔던 아이의 반응, 말과 행동들을 모두 숙지하고 하루를 시작해 왔습니다. 루프 속에 존재했던 2346명의 에른스트 쉴러 모두가요. 그리고 결국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키워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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