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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 - 6월 8일 (세계 해양의 날)

 종종 정신을 잃었다. 눈을 감았다 뜨고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가 정신을 차렸구나. 라고 자각하는 것 하나 뿐이었다.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 틈새 사이의 시간으로 다시 잠들어 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채로, 계속해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작은 소음을 듣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눈을 떴을 때는 내가 스스로 기억하는 감각과 다른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은 어디지.  눈을 뜨니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상한 약품 냄새, 덜그럭거리는 유리병 소리. 그리고 내 몸에 연결된….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일어났니?”
 어른. 어른이라는 느낌의 깊은 울림이었다. 이런 낮은 목소리는 잘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대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보자, 정말 뻔하디 뻔하게 미디어 매체에 나올 것 같이 고글을 쓰고 흰 가운을 입은…. 웬 연구원처럼 생긴 사람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라고 질문을 하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에른스트 쉴러. 이 연구소의 소장이야.’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나는 그래서 뭐, 그게 왜요? 더 할 말 있어요? 라고 말하듯 계속해서 빤히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에른스트는 한 번 작게 웃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게는 이제부터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네가 도와주지 않겠니? 영문도 모른 채 이 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런 아이에게 도와달라는 어른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라고 생각하던 순간, 무엇인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기가 서려왔다. 나는 얼떨결에 그 한기를 느끼며 일단 에른스트의 손을 잡았다. 왠지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에른스트는 내가 자신의 손을 마주 잡아주자 그걸 보고는 생긋 웃어주었다. 그러고는 운을 떼었다. ‘고맙구나.’ 그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언제부터 정신을 잃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잠시 생각을 하려고 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 있은 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사람을 무기로 만드는 실험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실험체가 될 거라고 했고. 하, 웃기지 않나. 도움이 필요하다고 지껄여 놓고는 그 도움이라는 게 결국 나를 실험체로 쓰려는 거라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 거의 즉각적으로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무엇인가가 있지는 않을 거라고, 결국 내가 생각하는 범주 안의 뻔한 장소일 거라고. 처음 이곳에 올 때부터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뭔가 왠지 모르게 진이 빠지고 힘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에른스트는 종종 내게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주었다. 나는 내 취향을 이야기하거나 바깥세상의 기호식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그가 어떻게 내 취향을 알아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알 수 있으니까 알고 있지.’ 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그는 항상 매우 바빠 보였다. 무엇인가 서류 뭉치를 여러 개 나를 때도 있었고, 다른 방에 있는 누군가를 관찰하러 간다고 할 때 또한 있었다. 내가 투명한 통 속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모습 뿐이었다. 이 곳에 있다고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내가 해야 하는 일도 크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저 몸에 연결되어 있는 이 선을 뽑지만 않은 채로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뭔가 상당히 시시하게 느껴졌다. 지루해.

 에른스트를 관찰하는 일은 매우 지루한 것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행동 반경이나 패턴이 똑같을 수가 있담. 이제는 관찰하는 것 따위 의미없다고 느꼈다. 아침 9시, 일어나서 커피를 타 한 잔 마신다. 아침 10시. 나를 포함한 모든 실험체들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선의 상태를 확인한다. 오전 11시. 서류 작업을 엄청나게 많은 양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점심 12시. 이른 점심을 한 끼 간단하게 먹는다. 오후 1시. 밖에 나가서 잠시 산책을 하고 온다. 오후 2시. 이 때 쯤에 간혹 실험체가 하나쯤 더 들어오는 때가 있다. 오후 3시. 실험체 하나하나의 상태를 살핀다. 오후 5시. 매일매일 색이 다른 약물을 주사한다. 오후 6시. 낮잠을 한 번 잔다. 오후 8시. 또 서류를 많이 처리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오후 9시. 늦은 저녁을 부랴부랴 챙겨 먹는다. 오후 10시. 나와 다른 친구들을 모두 재운다. 나는 또 그 다음 아침 9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 사이에 그가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에른스트는 뭔가 이상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마치 처음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인사를 건넨다. 안녕, 이 곳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지금 상태는 어떠니. 안녕, 일어났어? 잘 자더구나. 이곳은 연구소야. 내 이름은 에른스트 쉴러고.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는 것을 꼬박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른다. 거의 백 번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하루가 끝나갈 때, 그는 매번 나에게 이상한 사과를 한 번 한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렇게 영문을 모른 채로 잠이 들면 또 다시 다음날 아침이 되고, 에른스트는 또다시 내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내가 반응하게 되는 말 또한 점점 기술이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왜 다시 인사하는 거예요? 혹은 어제 했던 말을 또 하는 데에 의미가 있나요? 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매번 하던 똑같은 말이 아니라 그렇게 다른 말을 할 때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종이에 무엇인가를 메모했다. 내가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를 대략적으로 기록하는 것 같은데…. 그게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항상, 내게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고. 왜 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깨어날 때마다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을 기억했다.
 이 과정이 몇백 번 반복될 때까지는 이게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오백 번쯤 반복되었을 무렵부터는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똑같은 하루가 천 번쯤 반복되었을 때에는 무기력하게 축 처져서 그가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천 이백 번쯤 되었을 때에는 내가 들어가 있던 유리 관을 부수려고 시도했다. 이상하게도 하루가 지날 때마다 내가 부수고 손상시킨 모든 것은 원래 상태로 복구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것이 에른스트 쉴러 그 자체일지라도. 살아있는 인간에게 상처를 입혀도 다음 날이 되면 그 사람 또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 때부터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천 오백 번쯤 되었을 때에는 그가 내가 어떤 말을 할 때마다 기록하는 것인지 실험했다. 이런 저런 말을 다 늘어놓아 보기도 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전부 무시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에른스트는 그렇게 조금 특이한, 정형화되지 않은 반응이 나올 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종이에 무엇인가를 기록했다. 내 반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관찰하는 건가? 그런데 어떻게? 그는 변하지도 않고 딱히 내가 어제 했던 말이나 행동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런 존재가 어떻게 내 말을 기록하고 알아차리는 걸까.
 시간이 지날 수록 아침에 잠시 서류를 처리하는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고 길어진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한 시간, 두 시간이 걸리다가 2천 일쯤 되었을 때에는 하루에 네다섯 시간 정도를 서류 처리에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점점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뭘 하는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저 점점 지쳐갈 뿐이었다.

 그리고 하루는.
 2341일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니, 날짜를 셀 때 중간에 몇 번을 빠트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확히 며칠째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그 언저리이겠지. 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날은 내가 새로이 가지게 된 신체를 통해 내가 들어가 있는 공간의 유리를 모두 부숴 버렸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머리에는 뿔같이 생긴 것이 자라나고, 허리쯤에는 무엇인가 이상한 신체기관이 하나 더 생겨 그곳에서 문어다리같은 것을 빼내 늘렸다 줄였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걸 사용하니 유리는 아주 쉽게 부서졌다. 마치 지금까지 왜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듯이. 너무나도 쉽게 부서졌다. 그리고 그 뒤에는 조용히 웃음을 짓는 에른스트 쉴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었다.
 “B-334. 2346일만에 성공.”
 그렇게 말한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이미 그를 죽여버리고 난 뒤였다. 너무 싫어서 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그저, 내 몸에 달린 새로운 무엇인가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사람의 몸은 너무나 약해서 너무도 쉽게 부서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시 내일이 되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가 죽은 이상 더 이상 어제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세계관, 설정 정리]
 실험은 같은 날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처음 아이를 데려온 날을요. 계속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서 결국 이 곳을 부수고 생명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병기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에른스트 쉴러는 연구원이자 희생양입니다. 아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존재다. 라는 것을 그를 죽이는 것으로 확인해야 하거든요. 애초에 그런 목표로 배치되어 있는 연구원입니다. 아이는 조금 특별한 병기로 키워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뿔과 허리춤에 자라난 새로운 신체기관 이외에도 ‘반복되는 하루의 루프 속에서도 다른 존재와는 다르게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는 존재’로 키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하루를 기억할 수 있었고, 약 2346일이라는 날짜동안 자신 주변의 환경이 몇 번 초기화 되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 사실을 비로소 에른스트 쉴러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난 후, 루프가 끝난 후에야 알게 됩니다. 스스로가 갇혀 있던 곳이 루프 속이라고. 이제 아이는 전장으로 보내질 것입니다. 완전한 병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싸워야 하니까요. 그리고 아마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스스로가 영영 죽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겁니다. 자신이 죽을 때마다 꼬박 하루 전으로 돌아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요. 아이의 몸에 연결되어 있던 것은 아이를 서서히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새에 죽이는 약물을 주입하는 관이었고, 아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하루 전으로 돌아오며 그 과정에서 중간에 주사기를 통해 신체에 변형을 주었던 것의 영향으로 새로운 신체기관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에른스트 쉴러가 매일 처리했던 서류 작업은 ‘지금까지 아이가 보인 반응을 기록한 문서’의 확인 작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짜가 많이 지날 수록 서류의 양이 더욱 많아졌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루프 속의 또 다른 자신이 적어왔던 아이의 반응, 말과 행동들을 모두 숙지하고 하루를 시작해 왔습니다. 루프 속에 존재했던 2346명의 에른스트 쉴러 모두가요. 그리고 결국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키워졌으니까요.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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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 뼈가 꼬리로 달려있는, 색은 따로 정해지지 않은 듯한

등불을 하나 들고 있는 200cm 이상의 장신 캐릭터 이미지였습니다.

 


 

 

[말버릇] 
일단 대화를 할 때에 말을 주도하는 편은 아니다. 자신의 말이 끊긴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면 일단 듣고 보는 편이다. 과묵한 편. 
 
[습관] 
무엇인가 멋쩍은 일이 생겼을 때에 할 말이 없어지면 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작게 내는 편이다. 
 
[캐릭터성 뚜렷한 특징 한 가지] 
베일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이 마치 흰 배경 사이로 보이는 푸른 등불 같이 느껴진다. 보통의 인간들은 이 눈과 눈을 마주치게 되면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초식동물처럼 그대로 그 자리에서 바로 굳어버리곤 한다. 
 
[성격] 
기본적으로 느긋한 성격. 웃음이 많음. 미소를 거의 항상 짓고 있음. 그러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누군가가 건드리게 된다면 그 건드린 대상을 찾아가서 직접 조용히 응징해 처리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것] 
절벽의 폭포 (소리를 들으며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어서), 레몬 (조금 달달한 편인 레몬을 딱 좋아하며 생선 요리에 뿌려 잡내를 제거하는 기능도 마음에 들어하는 편이다.) 
 
[싫어하는 것] 
악인. 인간이라 별 능력도 없는 것이, 다른 것들을 해치려고 하는 마음을 품고 죄 없는 것을 해치는 것 <=그 상황 자체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 
 
[무서워하는 것] 
보통의 인간들은 인지할 수 없는, 우주 단위의 세계의 지배자 중 무엇인가 하나.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세상의 주신이 하나 있다. 유일하게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라 두려워하는 편. 그 주신이 딱히 무엇인가 제어하려고 하거나 개입하지는 않지만 경계 중이다. 
 
[가족관계] 
부모, 여동생 하나. 부모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 근황을 모르고 여동생 하나는 종종 챙겨주러 들르고 있다. 
 
[키] 
226cm 
 
[몸무게] 
108kg 
 
[종족] 
언데드 화이트 드래곤 
(마력이 거의 무한한, 언데드와 일반 드래곤 사이의 무엇인가. 이들은 주로 드래곤의 모습일 때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드래곤의 모습에서 온통 흰 뼈만 존재하는 느낌의 종족이다. 스켈레톤의 드래곤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의미 있는 사건] 
어릴 적에 여동생이 자신이 주었던 꽃을 잃어버렸다고 울었던 사건. 그 꽃은 이미 멸종 위기에 처해 있던 종이라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었다. 우는 여동생 옆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등불을 꺼내 은은하게 퍼지는 빛깔 옆으로 모여드는 벌레를 같이 구경하곤 했다. 그 뒤로부터 등불을 통해 벌레를 유인하거나 하는 식의 행동을 종종 재미 삼아 하는 듯하다. 여동생은 요즘 조금 컸다고 잘 상대를 해주지 않는 듯하다. 
 
[특징] 
가지고 있는 드래곤의 권능 중 마력을 무한대로 자유자재로 운용해 마법을 쓸 수 있는 것 외에도 정령들과 소통을 할 수 있다.  
 
등불로 유인하는 벌레 중 종종 반딧불이가 섞여 있기도 하다. 손에 들고 있는 등불에서 나오는 불이 반딧불이들에게는 종종 동족의 불로 보이는 듯 하다. 
 
[TMI] 
이전에 자신이 자주 가던 폭포에 한 번 놀러갔다가 어린 드래곤 하나를 발견했다. 자신의 언데드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드래곤이 경계할 것 같아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한 뒤 접근했었다. 그 상태에서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드래곤은 인간 상태의 모습에 척추로 이루어진 꼬리가 존재하는 것을 보고 이상한 존재라는 생각을 했는지 급히 도망치고 말았다. 
 
나비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나비는 호랑나비. 이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가 가장 좋아하던 동물이라고 한다. 
  
생 당근을 싫어한다. 씹으면 씹을 수록 단물은 나오지만 점점 푸석푸석해지는 그 식감이 별로라고 한다.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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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등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절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궁지에 몰린 상황. 그 누구도 어느 것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로 방황하고 있는 시간. 그런 곳 사이에, 검은 머리칼을 가진 한 여성이 나타났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왠지 모르게, 전장 한가운데에 꽂힌 깃발이 휘날리는 것과도 같아 보였다. 그녀는 자신 주위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가고, 전부 어수선하게 아수라장이 되어 가던 그 때 자신의 앞으로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것과 마주했다. 그리고 그녀가 나즈막히 명령했다.
 “멈춰.”

 일상은 늘 똑같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수행한다. 학교에 가야 하는 학생은 등교를 하고, 회사에 가야 하는 직장인은 출근을 한다. 도시는 언제나 그렇게 북적인다. 그리고 언제나 아무 일 없다는 듯 보이는 것은 특별히 없었다. 그러나 이곳, 지금 이 순간에. 도시 한가운데를 꿰뚫듯 나타난 커다란 무엇인가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마구 건물을 부수는 괴물은 마치 괴수가 등장하는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물론 대책은 있었다. 이곳에 괴물이 존재한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그에 맞설 만한 초능력자들 또한 존재했으니까. 그러나 그 초능력자들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 괴물이 움직이는 대로 끌려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저걸 막을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평범하게 등교하고, 느긋하게 졸며 출근하던 이들이 단말마를 내지르다가 괴물에게 집어 삼켜지기도 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도망치는 일 뿐이었기에. 두 다리를 움직여 필사적으로 그 곳에서 벗어나려 할 뿐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몸집이 얼마나 컸던가. 녀석이 한두 발자국만 움직여도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의 걸음이 금세 따라잡혔다. 그러니 사람들은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이 내가 향하는 방향으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나 좀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두라고.
 그렇게 눈을 질끈 감고 마음 속으로 처절한 기도를 하며 보이는 곳으로 일단 내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미 아수라장이네요.”
 무엇인가가 연속적으로 부딪히는 듯한 굉음이 들려 시선을 옮기면, 그곳에 보이는 것은 하늘에 떠 있는 헬기였다. 아마 지상 통로는 민간인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해야 해 공중을 통해 벙력을 투하할 생각인 것 같은데…. 이게 웬걸, 헬기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은 잘 훈련된 특수부대원 한 부대도 아니고 최신식 병기도 아닌 그저 키가 조금 큰 여자아이였다. 괴물은 자신이 한껏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와중, 난데없이 나타난 조그마한 장치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다행히도 헬기를 조종하던 운전병의 실력이 출중해 그것을 피할 수 있었지만…. 만일 저것에 맞기라도 한다면 그녀가 타고 있는 헬기 또한 부서지는 꼴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검은 눈꺼풀을 조용히 감았다가 다시 눈을 내리 떴다.
 저 아래에, 내가 처리해야 하는 녀석이 있다. 몸집은 아주 큰 편이었다. 일반적인 민간인 거주 아파트로 비유했을 때 약 5층 높이의 아주 거대한 녀석이었다. 저런 것에게 맞으니 건물이 박살이 나고 사람이 개미 밟히듯 밟히고 잡아먹히는 거겠지. 다른 능력자들이 손을 쓸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대충 예상하고 있기는 했다. 그나마 이상한 정신 조종 능력이라든가, 혹은 지능적인 전략을 사용한다든가 하는 것이 없는 직관적인 괴물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제이에게는 이 편이 오히려 훨씬 알기 쉽고 처리하기도 수월할 것이다. 제이는 그대로, 헬기에 함께 타고 있던 대원에게 신호를 주고는 그 자리에서 안전장치 하나 없이 뛰어내렸다. 이런 게 왜 가능한지는 몰랐다. 제이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으로 이미 그녀는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달기에 충분했으나, 최소 아파트 5층 높이 이상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멀쩡할 수 있는 우직한 모습이 그녀에 대한 다른 소문들을 더 부풀려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 모두를 날려버릴 수 있다.
 그것이 능력자들 사이에 돌고 있는 어느정도 부풀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소문 중 하나였다.
 그녀가 명령했을 때 말을 듣는 것은, 괴물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인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그녀에 대해 돌고 있는 소문 중 하나였다. 아무도 그 소문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제이가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일은 없었으며, 있다 하더라도 그 직후 찰나의 순간에 그 사람의 기억을 지워버릴 것이 분명했으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으나, 왜 그럴 것 같냐는 질문을 한다면 아마 다들 같은 대답을 뱉어내겠지.
 그녀라면 왠지 그냥 가능할 것 같아서.
 그렇게 제이는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먼지가 휘날리는 것 말고는 별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제이는 반사적으로 나온 낙법 자세를 접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몸에 묻은 먼지를 이리저리 털어냈다. 그러고는 제 눈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거대한 무엇인가를 똑바로 마주 올려다 보았다. 이것은 분명, 그녀가 알고 있는 ‘괴물’ 중 하나이다. 그러니 이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망설일 이유는 전혀, 한 가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짧은 시간 내에 그것과 눈이 마주치며 생각하고 마주한 제이가 생각해 낸 결론이었다. 그 말이 맞았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었고, 그녀가 망설일 만한 이유도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저기 저 손에 잡고 있는 인간 한 명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괴물이 마치 장난감처럼 한쪽 손에 잡고 있는 인간 한 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 무엇인가를 한다면 저 사람이 다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괴물을 처리할 거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에게 해를 끼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안전하게 구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사이에 괴물의 꼬리가 그녀의 머리 위 허공을 가르며 옆에서 옆으로 날아갔다. 거대한 무엇인가였다. 그리고 그녀는, 저 괴물이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크게 드러냈다. 평소에 느껴질 것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도록. 이윽고 제이는 괴물과 눈을 마주했다. 마치 물리적으로 괴물의 눈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도록 고정시키는 것처럼, 괴물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작은 몸집으로 그것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는 자신 주위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가고, 전부 어수선하게 아수라장이 되어 가던 그 때 자신의 앞으로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것과 마주했다. 그리고 분명 그것은 못 들었을 법한 크기로, 중얼거리듯 한 마디를 뱉었다.
 “멈춰.”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그것은 이내 신경이 마비되듯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인간을 잡고 있던 손에서 또한 힘이 풀린 것인지 그 인간을 놓치고 말았다. 제이는 재빠르게 떨어지는 인질을 받아내러 발을 움직였다. 헬기에서 그녀를 내려 준 대원들, 주위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나름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 보려 애쓰던 온갖 초능력자들이 그녀의 말 한 마디로 괴물이 모든 행동을 멈추고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넋을 놓고 바라보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제이는 이미 매우 빠른 속도로 떨어져 가던 인질을 받아낸 후였다.
 그래, 그것이.
 이것이 바로 그녀의 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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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면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이것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당연한 일이면서도,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다. 보통 사람의 심장은 스스로가 박동을 느낄 정도로 크게 요동치지 않는다. 특별히 이상이 있거나 어떤 감정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나 우성은 요 며칠 새 계속해서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마다 스스로의 심장이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분명 어떤 한 종류의 설렘이었다.
 눈을 뜨는 것이 즐거웠다. 원래도 괴롭다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 싫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지만, 한층 더 기대감과 고양감으로 삶이 가득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어디론가 갑자기 떠나버려도 스스로 여행이라고 생각할 것 같을 정도로.
 
 그 후로 김낙수의 행동은 비슷했다. 종종 우성을 찾아왔고, 그에게 무엇인가를 더 해주려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다른 누군가가 그런 대우에 대해 물어본다면 “친해서”라는 말로 둘러댔다. 마냥 그게 좋았다. 계속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다름아닌, 불확신에서 기인한 불안이었다.
 왜 아무런 말도 없지.
 분명,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텐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 어딘가 한 켠이 불편하고 아프지. 무엇인가 잊고 있는 것처럼 내 마음이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거지. 그렇게 한참을 고민했다. 다음 번에 낙수가 우성을 찾아왔을 때도 우성은 그저 막연히 낙수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낙수는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 이질감을 느꼈다. 심경의 변화가 원래 표정이나 몸짓에 많이 드러나는 편은 아니라 해도, 무엇인가 걸리는 게 있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나? 하는 것 정도는 그 또한 충분히 곁에 있는 상대가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김낙수는 며칠간 조금 더 지켜보고 우성의 상태를 살피기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무엇인가를 하거나 개인적으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시간이 아닌 때에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조금 더 많아지게 되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할 때 우성을 조금 더 챙기는 것을, ‘친해서’라는 명목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어느 날은 두 사람의 일정이 겹치지 않았고 함께 있기 위해서는 굳이 시간을 따로 빼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렇게 했다. 보고 싶다고 찾아왔고, 특별하다고 이야기했다. 어느 날은 굳이 우성 혼자 해도 되는 일을 자신의 손으로 대신 해 주었다. 이를테면, 작게 난 상처를 대신 치료해 주는 일이라든가. 우성은 그런 일을 겪으면서 순간순간 다시 안심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엇인가 걸리는 마음이 다시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고민을 계속해서 이어갈 뿐이었다. 당장에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것은 좋은데, 우성은 스스로의 마음이 왜 이렇게 편치 못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어느 날은 혼자서 둘이 함께 시간을 보냈던 곳으로 다시 찾아가 같이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다시 되짚어 보았다. 그 때의 감각을 떠올리면 심장의 고동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무엇인가 순수하지 않고, 불순물이 섞여들어 있다…. 우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그래서 이질감이 강하게 드는 이 불순물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어지러울 때 마다 평소에 하던 연습을 더욱 치열하게, 더 많이, 더 몰두해서 하게 되었다.
 낙수는 며칠 새 다른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연습에만 미친 듯이 몰두하는 우성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원래 연습을 열심히, 그리고 많이 하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태워간다는 느낌으로 하는 녀석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최근 며칠간 느꼈던 우성의 상태가 함께 떠올랐다. 그것과 무언가 연관이 있을까. 자신이 모르는 심적인 무언가가 있을까. 이렇게나 눈에 보일 정도로 연습에 몰두하며 잊어야 할 만큼. 우성을 쥐고 흔드는 것이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저 우성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 함께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먼저 이야기해줄 것이라 생각했고,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렇기에 그가 혼자서 감당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하고 그의 결정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존중은 얼마 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우성이 먼저 그것을 치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연습에 몰두하던 것을 멈추고, 함께 어디 한적한 곳을 같이 걸으며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우성은 그동안 해왔던 생각에서 이어진 스스로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불순물의 정체를 찾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낙수와 관련된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기뻤다. 좋았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전혀 제어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도 어쩔 줄을 모를 정도로 행복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불순물처럼 그의 마음에 끼어든 감정은 의문과 약간의 불안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무슨 사이가 되는 거지.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으니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직접 물어보기에는 겁이 났다. 한 편의 영화처럼 행복했던 그 순간이, 스스로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처럼 이렇게 편치 못한 상태로 상황을 유지하는 것도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화를 요청했다.
 학교 뒤편의 샛길을 따라 걸으며,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주변을 살피기만 했다. 원래는 하교했어야 하는 시간보다 조금 뒤의 시점이어서 그런지 저 너머 하늘에 있던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성은 조용히 낙수를 살피다가 낙수가 앞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저 멀리에 시선을 두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지. 그리고 그렇게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요즘 뭔가 어려운 게 있냐.”

 낙수가 먼저 운을 떼었다. 우성은 조용히 “아….” 하고 소리를 내다가 그렇다고 답해야 할지, 아니라고 답하는 것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그가 대답을 하기 전에 낙수가 한 번 더 말을 이어갔다.
 “그래 보여서 물어봤어. 없다면 그런 거겠지만. 하지만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것이 맞다면, 편하게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도 네 마음의 짐을 같이 덜어줄 수 있으니까. 우성은 그 말이 막연히 고마울 뿐이었다. 그리고 낙수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은 표정, 평소와 같은 말투. 펑소와 다름 없는 걸음걸이. 그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혼자 고민에 빠져 있었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꽁꽁 싸매고 있는 것 자체가 나를 다정하게 챙겨준 형에 대한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생각했다. 원래도 스스로가 하고 있던 고민에 대한 말을 꺼내기 위해 같이 걷자고 한 것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빠르게 말을 꺼내는 편이 좋겠다 생각했다.

 “음…. 형. 혹시, 우리는 무슨 사이인가요?”
 괜히 멋쩍어서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김낙수는 그 말을 듣고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더니,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성은 왜 그런 건지 알 길이 없어 그의 반응을 연신 살피다가도, 곧 말해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어떤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별 말이 따로 없길래….”

 낙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우성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조심스러워 보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모습도 보였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었나 생각했다.
 “저는 형이 그 뒤로 별 말이 없길래 우리가 아직 아무런 관계도 아닌 줄 알았어요.”
 김낙수가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참으려고 해도 그냥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보였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마냥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아, 이런 거였구나. 낙수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태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에 그쳤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 때 내가 사랑한다고 한 뒤부터 사귀고 있던 것 아니었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한 번 더 이야기했다.
 “난 당연히 자연스럽게 너도 사귀고 있다고 생각할 줄 알았어.”

 우성은 잠시 아무런 말도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러면….”
 “그래도 생각해 보면, 따로 언급이 특별히 없다면 충분히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그런 고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모든 것이 퍼즐처럼 들어맞았다. 그러면 그 후로 “친하다”며 둘러댔던 것도, 더 이상 둘러대는 것 뿐만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우성이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훈련 후 집에 돌아갈 때 같이 가자며 굳이 다른 일정이 있었음에도 자신이 있는 곳까지 찾아왔던 것도. 그거 조금 다친 거 가지고 별 말 없이 우성을 끌고 와서 묵묵히 반창고를 붙여줬던 것도. 모두, ‘그런’ 의미의 행동들이었을 것이다. 우성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 무엇인가 자신의 안에서 요동치는 것이 존재함을 느꼈다. 분명 이전에도 계속해서 똑같이 움직이고 있었을 심장이. 그것의 고동과 맥동이 감각 깊은 곳까지. 또 다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며 스스로의 울림을 전하고 있었다. 아, 이게 안도라는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전에 느꼈던 설렘.

 생각을 마친 우성은 낙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다. 내가 다 오해하고 있었다고, 사실은 아무런 정의가 없어서 그저 아무 관계 아닌 것으로 내버려 두는 줄로만 알았다고.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가 느꼈던 함께했던 시간들에서 나온 깊은 설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이 상대방에게도 똑같이 있을 것이라는 견고한 확신은 없어서…. 하지만 머릿속에 들어찬 많은 생각 중 어떤 걸 입밖으로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계속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아무런 티가 나지 않을 리가 없지. 김낙수는 보였다. 우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멀을 하고 싶어할지 조차도 대략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저 우성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어서,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우성의 고민은 그리 오래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저, 그래. 딱 한 마디면 충분했다. 지금까지의 형의 행동들에 대해 그동안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마디를 뱉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보았던….

“사랑해요.”

 여전히, 하얬던 우성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낙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김낙수는 그 말을 듣고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나도.”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보았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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